색계: 섹스 앤 센서빌리티 영화

1990년대의 초반, 정확히 얘기하자면 1991년 8월이었던 그때, MBC 베스트극장에서 당시로서는 꽤 센세이셔널한 내용의 드라마를 방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최민수가 왜군 장군 역을 맡고 오연수가 조선 처녀 역할을 맡았었던 드라마였는데 초반의 시놉시스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논개 스토리와 비슷했었죠. 조선 땅 어느 지역의 성을 점령한 왜군, 그리고 그들 중 우두머리인 왜군 장수를 죽이기 위해 접근하는 조선 여인을 중심으로 이야기로 진행되었고 최민수가 연기한 왜군 장수가 우리네 사극 속 전형적인 왜군 장수의 틀을 벗어나 제법 멋지게 표현될 때만 해도 시청자들은 마냥 흥미롭게만 보아 넘겼을 것이에요. 왜놈 장수 중에도 젊고 멋진 놈 하나 쯤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보고 있는 가운데 왜군 장수(최민수)를 살해하기 위해 접근하던 미모의 조선 여인(오연수)은 왜군 장수와 동침을 하게 되고 왜군 장수(최민수)의 로맨틱한 대응 속에 묘한 애정이 싹트게 됩니다. 작전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조마조마해지는 가운데 운명의 그날 밤이 다가오고 암살 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나게 되었죠. 왜군 장수(최민수)의 목은 효수되어 장대에 내걸리고 장수를 잃은 왜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쫒겨갑니다.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논개 비슷한 스토리로 진행되던 드라마는 그 후반부에, 조선을 침략해서 코 자르고 귀 베어간 왜군의 잔인함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조선땅에 있는 조선 사람들의 일그러진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왜군 속에 잠입해서 왜장을 살해하는데 큰 공을 세운 조선여인(오연수)은 공을 기념한 포상을 받기는커녕 왜놈과 사통해서 정조를 잃은 여인이란 유교적 비난에 직면하게 됩니다. 동네 어른부터 아이까지 그녀를 비난하며 쑥덕거리는 거에요. 서당에서 빨래터까지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그녀를 향한 험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그녀(오연수)를 둘러싼 외부 상황도 그렇게 혼란스러웠거니와 왜장 살해의 일등공신이었던 그녀 자신도 그녀에게 호의적으로 대해졌던 왜군 장수(최민수)를 잊지 못하여 혼란스러웠더랬습니다. 왜군 장수 암살 작전을 중심으로 스토리를 이어갔던 이 단막극의 후반은. 유교적 엄숙주의를 내세운 조선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내몰리는 그녀의 수난이 이어졌고 그런 내몰림 끝에 폐인이 되어가는 여인의 모습을 그려내었더랬죠. 그리하여 방송이 끝난 뒤 방송을 내보낸 MBC 방송국으로 항의전화가 쏟아졌다는 일화가 있는 것이 바로 이 MBC 베스트극장 달 편이었습니다.

이안 감독이 만들어내고 중국 당국에 의한 거센 반발을 직면하고 말았던 영화 색계는 1991년에 방영되었던 MBC 베스트극장 달이 펼쳐낸 한바탕 소동극을 연상케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때 그 시절 우리네 여배우 오연수마냥 순진무구한 이미지의 탕웨이는, 친일파 관리(양조위)를 암살하기 위해 정(情)을 통하는 여학생 역할을 맡아 열연을 펼칩니다. 촛불이 꺼지고 어두워지면 두 남녀가 으레 그렇듯 정을 통했으리라 생각하게 만드는 우리네 안방극장 특유의 간접적인 표현 대신 영화 속 탕웨이와 양조위는 과감한 노출과 독특한 체위를 통해 보다 직접적으로 두 사람의 육체적 결합 상태를 보여줍니다. 겨드랑이 체모와 과격한 체위가 한때 화제가 되기도 했었죠. 다른 것이 또 하나 있으니 드라마 달에선 목표로 정했던 왜군 장수(최민수)의 목이 잘리고 왜군이 성에서 물러나게 되었지만 영화 색계에선 친일파 암살이 실패로 끝나고 만다는 것이에요.

하지만 두 작품 모두, 일본의 침략 속에 높은 신분의 인물을 암살하기 위해 미인계를 사용하고 그렇게 미인계의 도구가 된 여인이 암살 대상과 육체적 관계를 맺던 중에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는 점만큼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7,80년대 그리고 90년대 초반까지 아니 지금도 우리 사회에 깔려있는 국민적 반일 감정에 어깃장을 놓는 이야기의 진행 역시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난징 대학살 등을 겪은 중국의 반일 감정 역시 우리네 이상이면 이상이지 그 이하는 아닐 것인데 색계 속 항일 세력은 아마추어다운 행동을 보이던 끝에 작전을 실패로 끝나게 만듭니다. 우리로 따지면 전대협이나 한총련 쯤에 해당될 젊은 학생들이, 또래 여학우이며 동지인 여주인공(탕웨이)을 육체적 미끼로 삼아 암살 작전에 돌입하지만 이들의 미숙함과 친일파 관료와의 뜨거운 밀회가 주는 쾌락은 그녀의 마음을 점점 흔들어놓게 된 셈이랄까요..

왜군 장수와 잠자리를 하여 정절을 잃었다고 비난을 하는 조선 백성들과 영화 색계 속 중국인 애국 청년들의 서툰 행보는 묘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념을 앞세워 한 젊은 여인을 소모품처럼 내몰고는 그 소모품의 정신적 무너짐을 보살펴주기는커녕 더욱 더 머리 속을 헝클어트리고 말았다는 공통점말이죠. 그 이념은 시대에 따라 항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반공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반미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네 순진하고 아름다운 여인을 정치적 소모품으로 삼아 육체의 덫을 만들어 놓는 조직의 이념은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바껴갑니다. 하지만 그 이념의 이름이 어떠하든 작전에 투입된 여인이 소모품이 된다는 것은 변함이 없는 것이죠. 암살을 위한 소모품으로 이용되고 있었던 여인은 마지막 순간에 남자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지 않습니다. 왜 그녀는 그런 행동을 했을까요? 남자를 사랑해서였을까요? 어쩌면 그녀는 이념 속에 매몰되버린 그녀 자신의 가짜 모습이 아닌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진짜 자신을 찾고 싶어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조선 백성들의 비난 속에 괴로워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드라마 달의 여주인공처럼 영화 색계의 여주인공(탕웨이) 역시도 자기파괴적인 행보를 택하고 맙니다. 그들이 속한 집단이 가진 이념을 위해 제 몸 하나 바쳐 거룩한 희생을 하길 원하는 나라에선 자신들의 나라 민중이 몸 바쳐 암살에 성공한 영웅을 기존의 가치관을 내세워 되려 비난을 한다든지 중요한 임무가 주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듭된 욕정에 감수성이 흔들려 작전을 실패로 끝나게 만드는 모습은 국가적인 입장에선 상당히 불편해보이기 쉬운 것이기도 합니다. 드라마 달이 방영되고 난 뒤 MBC 방송국으로 숱한 항의가 들어왔듯 중국에서도 색계란 영화를 불편하게 보는 사람들이 많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겠죠. 이안 감독의 영화 중에 엠마 톤슨과 케이트 윈슬렛, 휴 그랜트와 앨런 닉맨이 출연했던 센스 앤 센서빌리티란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의 제목을 빗대 이 영화 색계를 간단히 표현하자면 섹스 앤 센서빌리티가 아닐까 싶어요. 여주인공의 마지막 순간 탕웨이가 선보이는 표정 연기는 실로 담담하면서도 드라마틱합니다. 미안함도 원망도 공포도 불안도 없이 '이게 나에요. 진짜 나라구요'라고 눈빛으로 말하는 것 같달까요.




덧글

  • 동굴아저씨 2016/12/08 09:53 #

    토사구팽 이군요.
  • 동사서독 2016/12/08 13:45 #

    그런 셈이에요.
  • Lacuna 2016/12/09 00:57 #

    어떤 이상이 무너질때 우리의 반응은 참 거셀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재밌게 읽었습니다.
  • 동사서독 2016/12/09 18:18 #

    재미있게 읽으셔다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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